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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토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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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폰토스 왕국은 흑해 연안과 폰토스 산맥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왕국으로, 페르시아계 가문이 기원전 4세기에 건국했다. 폰토스는 흑해 연안의 그리스 도시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문화를 융합했으며, 페르시아, 그리스, 토착 신앙이 혼합된 종교를 가졌다. 폰토스 왕국은 미트리다테스 6세 시대에 로마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으며, 결국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폰토스 왕국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운용했으며, 헬레니즘 군대와 로마 군대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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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토스 왕국
지도
폰토스 왕국의 최대 영역: 미트리다테스 6세 통치 이전 (포도색), 그의 정복 이후 (자주색),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그가 정복한 지역 (분홍색)
폰토스 왕국의 최대 영역: 미트리다테스 6세 통치 이전 (포도색), 그의 정복 이후 (자주색),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그가 정복한 지역 (분홍색)
기본 정보
공식 명칭폰토스 왕국
로마자 표기Pontos
지위독립 왕국 (기원전 281년 – 기원전 63년)
로마 공화국로마 제국의 위성국 (왕국의 동쪽 부분, 기원전 63년 – 서기 62년)
정치 체제군주제
존속 기간 시작기원전 281년
주요 사건 시작미트리다테스 1세가 건국
사건 1폼페이우스의 로마 공화국에 정복됨, 동쪽 지역은 위성국으로 남음
사건 날짜 1기원전 63년
존속 기간 종료서기 62년
주요 사건 종료네로 황제 시기에 로마 제국에 합병됨
이전 국가 1안티고노스 왕조
다음 국가 1로마 제국
공용어그리스어 (기원전 3세기 이후 공식 언어, 해안 도시)
페르시아어, 아르메니아어 (기원전 115년 이후), 아나톨리아어 (지역 및 왕조)
수도아마시아
시노페
종교그리스 다신교, 이란 종교, 지역 아나톨리아 종교를 통합한 혼합 종교
지도자 칭호바실레우스
역대 지도자
미트리다테스 1세 크티스테스기원전 281년–기원전 266년
아리오바르자네스기원전 266년–기원전 250년
미트리다테스 2세기원전 250년경–기원전 220년경
미트리다테스 3세기원전 220년경–기원전 185년경
파르나케스 1세기원전 185년경 – 기원전 170년경
미트리다테스 4세, 라오디케기원전 170년경 – 기원전 150년경
미트리다테스 5세 에우에르게테스기원전 150년경 – 기원전 120년경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기원전 120년–기원전 63년
파르나케스 2세기원전 63년–기원전 47년
다리우스기원전 47년–기원전 37년
아르사케스기원전 37년
폴레몬 1세기원전 37년–기원전 8년
피토도리다기원전 8년 – 서기 38년
폴레몬 2세서기 38년 – 서기 62년

2. 폰토스 지역의 특징

폰토스 왕국은 흑해 연안 지역과 폰토스 산맥을 경계로 한 내륙 지역으로 나뉜다.[47][12] 흑해 연안은 온난 다습하고 비옥하여 농업과 어업에 유리했다. 폰토스 산맥은 해안과 내륙을 분리하는 자연 장벽 역할을 했으며, 강 계곡은 해안선과 평행하게 뻗어 있어 소떼, 수수, 체리(케라수스라는 도시에서 이름 붙음), 사과, 등의 과일 나무 재배에 유리했다.[47][12] 해안 지역은 아마스트리스와 폰토스가 정복한 후 수도로 삼은 시노페 등의 그리스 도시들이 지배했으며, 목재, 어업, 올리브가 풍부했다.[47][12]

왕국을 나누었던 폰토스 산맥.


내륙 지역은 고원 지대로, 광물 자원이 풍부하고 목축업이 발달했다. 파르나키아 남쪽 해안가 인근의 광산에서는 철과 은이 풍부하게 생산되었으며,[47] 칼리베스 산맥에서 나오는 강철은 그리스에서 꽤나 유명했다.[47] 구리, 납, 아연, 비소도 생산되었다.[47][12] 폰토스 내륙에는 리쿠스와 이리스 강과 같은 비옥한 강 계곡이 있었으며, 내륙의 주요 도시는 초창기 폰토스의 수도였던 아마시아로, 폰토스 왕궁과 왕가의 무덤들이 있었다.[47][12]

해안과 내륙 사이의 분리는 문화적으로도 나타났다. 해안 지역은 대부분 그리스화되어 해상 무역에 집중한 반면, 내륙 지역은 아나톨리아 카파도키아인들과 페르시아 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란계 귀족들의 통치를 받았다.[48][13]

폰토스 왕국은 흑해 연안의 해안 지역과 폰토스 산맥[47][12]으로 분리된 내륙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문화적으로도 차이를 보였다. 해안 지역은 아마스트리스와 시노페 등의 그리스계 도시들이 번성하여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47][12] 반면, 내륙 지역은 페르시아 제국 시대부터 이란계 귀족들이 통치하며, 아나톨리아 카파도키아인과 파플라고니아인들이 거주하여 페르시아와 아나톨리아 토착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유지했다.[48][13]

폰토스 왕국의 신앙은 페르시아, 그리스, 토착 신앙이 혼합된 형태였다. 주요 신들은 제우스를 칭한 페르시아의 아후라 마즈다, 달의 신 멘 파르나코우, 마 (Ma, 키벨레로 해석됨) 등이었다.[48][13] 특히 태양신은 왕가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신 아후라 마즈다와 동일시하여 아폴론과 미트라를 숭배하였고, 왕들의 이름으로 "미트라에게 주어진"을 뜻하는 미트리다테스를 사용했다.[49][14]

폰토스의 문화는 이란, 아나톨리아, 그리스 문화적 요소가 혼합된 형태로, 미트리다테스 6세 시기에는 그리스어가 공식 언어였으나,[50][44][15][5] 내륙에서는 아나톨리아어가 계속 사용되었다.

2. 1. 지리적 특징

폰토스 왕국은 지리적으로 크게 흑해 연안 지역과 폰토스 산맥을 경계로 한 내륙 지역으로 나뉜다.[47][12] 흑해 연안은 온난 다습하고 비옥하여 농업과 어업에 유리했다. 폰토스 산맥은 해안과 내륙을 분리하는 자연 장벽 역할을 했으며, 강 계곡은 해안선과 평행하게 뻗어 있어 소떼, 수수, 체리(케라수스라는 도시에서 이름 붙음), 사과, 등의 과일 나무 재배에 유리했다.[47][12] 해안 지역은 아마스트리스와 폰토스가 정복한 후 수도로 삼은 시노페 등의 그리스 도시들이 지배했으며, 목재, 어업, 올리브가 풍부했다.[47][12]

내륙 지역은 고원 지대로, 광물 자원이 풍부하고 목축업이 발달했다. 파르나키아 남쪽 해안가 인근의 광산에서는 철과 은이 풍부하게 생산되었으며,[47] 칼리베스 산맥에서 나오는 강철은 그리스에서 꽤나 유명했다.[47] 구리, 납, 아연, 비소도 생산되었다.[47][12] 폰토스 내륙에는 리쿠스와 이리스 강과 같은 비옥한 강 계곡이 있었으며, 내륙의 주요 도시는 초창기 폰토스의 수도였던 아마시아로, 폰토스 왕궁과 왕가의 무덤들이 있었다.[47][12]

해안과 내륙 사이의 분리는 문화적으로도 나타났다. 해안 지역은 대부분 그리스화되어 해상 무역에 집중한 반면, 내륙 지역은 아나톨리아 카파도키아인들과 페르시아 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란계 귀족들의 통치를 받았다.[48][13]

2. 2. 문화적 특징

폰토스 왕국은 흑해 연안의 해안 지역과 폰토스 산맥[47][12]으로 분리된 내륙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문화적으로도 차이를 보였다. 해안 지역은 아마스트리스와 시노페 등의 그리스계 도시들이 번성하여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47][12] 반면, 내륙 지역은 페르시아 제국 시대부터 이란계 귀족들이 통치하며, 아나톨리아 카파도키아인과 파플라고니아인들이 거주하여 페르시아와 아나톨리아 토착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유지했다.[48][13]

폰토스 왕국의 신앙은 페르시아, 그리스, 토착 신앙이 혼합된 형태였다. 주요 신들은 제우스를 칭한 페르시아의 아후라 마즈다, 달의 신 멘 파르나코우, 마 (Ma, 키벨레로 해석됨) 등이었다.[48][13] 특히 태양신은 왕가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신 아후라 마즈다와 동일시하여 아폴론과 미트라를 숭배하였고, 왕들의 이름으로 "미트라에게 주어진"을 뜻하는 미트리다테스를 사용했다.[49][14]

폰토스의 문화는 이란, 아나톨리아, 그리스 문화적 요소가 혼합된 형태로, 미트리다테스 6세 시기에는 그리스어가 공식 언어였으나,[50][44][15][5] 내륙에서는 아나톨리아어가 계속 사용되었다.

3. 역사

폰토스 왕국은 본래 카파도키아 (캇파투카, Katpatuka) 페르시아 샤트라프의 일부였다. 폰토스 왕국을 건국한 페르시아계 가문은 기원전 4세기에 미시아 지역의 그리스 도시 키우스를 다스렸으며, 이 가문 최초로 알려진 인물은 키우스의 미트리다테스였다.

아마시아 산에 있는 고대 폰토스의 무덤


=== 키우스의 미트리다테스 왕조 ===

미트리다테스 1세는 기원전 302년 안티고노스 1세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자 데메트리오스 1세의 도움을 받아 6명의 기수를 데리고 동쪽으로 탈출했다.[52][17] 그는 처음에는 파플라고니아의 키미아타로, 이후에는 카파도키아아마시아로 이동하여 기원전 302년부터 266년까지 그곳을 다스렸다.[52][17] 그는 셀레우코스 1세와 대립했으며, 기원전 281년 또는 280년에 카파도키아 북부와 파플라고니아 동부의 왕(바실레우스)임을 선포하고 서쪽으로 상그리스우스 강까지 영토를 확장했다.[52][17] 그의 아들 아리오바르자네스는 기원전 279년에 흑해의 주요 항구인 아마스트리스를 점령하여 폰토스 왕국의 세력을 확장했다.[53][18] 미트리다테스 1세는 갈라티아인과 동맹을 맺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군대를 격파했다.[53][18]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제1차 시리아 전쟁을 통해 소아시아에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으며, 헤라클레이아 폰티케와 동맹을 맺어 미트리다테스 1세와 대립 관계에 있었다.[53][18]

=== 폰토스 왕국의 발전과 헬레니즘화 ===

아리오바르자네스의 짧은 통치 기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가 사망한 후 아들인 미트리다테스 2세 (기원전 250년 — 기원전189년)가 왕위를 이었으나 갈라티아인들에게 공격받았다.[54][19] 미트리다테스 2세는 당시 갈라티아인들과 전쟁 중이던 헤라클레이아 폰티케의 도움을 받았으며,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에 대항하던 안티오고스 히에락스를 지원하기도 했다.[54] 미트리다테스 2세는 기원전 220년에 시노페를 공격했으나 점령에는 실패했고, 셀레우코스 2세의 자매와 혼인하여 폰토스 왕국과 셀레우코스 제국 간의 유대 관계를 강화했다.[54][19] 미트리다테스 2세 사후, 그의 아들 미트리다테스 3세의 집권 시기 (기원전 220년 – 기원전 198/88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54][19]

폰투스의 왕 ''파르나케스''가 새겨진 청동 방패 (80.AC.60). 게티 저택 소장.


파르나케스 1세 (기원전 189년 – 기원전 159년)는 흑해 연안의 그리스 도시들을 정복하며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55][20] 그는 기원전 188년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에 대항하는 비티니아의 프루시아스 1세의 전쟁에 동참하였으나,[55] 기원전 183년에 강화 조약을 맺었다.[55][20] 파르나케스 1세는 기원전 182년에 시노페를 점령하고, 코티오라, 파르나시아, 동쪽의 트라페주스 등의 해안 도시들을 차지하여 아나톨리아 북부 해안가 대부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55][20] 그는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와 카파도키아의 아리아라테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기원전 179년에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갈라티아파플라고니아, 티움 도시 등 정복한 지역들을 포기해야만 했다.[55][20] 그러나 시노페는 계속 유지했다.[55][20] 파르나케스 1세는 북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케르소네소스의 도시들과 불가리아 해안가에 있는 오데수스 같은 다른 흑해 도시들과 동맹을 맺었다.[55][20]

파르나케스 1세의 형제 미트리다테스 4세는 친로마 정책을 추구하며, 기원전 155년 비티니아의 프루시아스 2세에 맞선 로마의 동맹 아탈루스 2세 필라델포스에게 도움을 주었다.[56][21] 그의 후임자 미트리다테스 5세 에우에르게테스는 로마의 동맹으로 남아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했고, 에우메네스 3세 (아리스토니쿠스)에 맞서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57][22] 로마는 페르가몬 왕국의 일부를 소아시아 속주로 전환시키는 한편, 미트리다테스 5세에게 프리기아 주요 지역을 수여했다.[57][22] 미트리다테스 5세는 그의 딸 라오디케를 카파도키아의 왕 아리아라테스 6세와 혼인시켰다.[57][22]

미트리다테스 5세는 그리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헬레니즘화를 추진했다.[57] 그는 에게 해 지역의 그리스 용병들을 폭넓게 사용한 최초의 폰토스 왕이었고, 델로스에서 의식을 치렀으며, 그의 왕국에서 발행되는 주화에 아폴론처럼 자신을 새겨넣기도 했다.[57][22] 미트리다테스 5세는 기원전 121/0년 시노페에서 암살당했다.[57][22] 미트리다테스 5세의 두 아들 미트리다테스 6세와 미트리다테스 크레스투스가 아직 어렸기에, 폰토스는 그의 부인 라오디케의 섭정 통치하에 놓였다.[58][23]

=== 미트리다테스 6세와 로마와의 전쟁 ===

|thumb|right|루브르 박물관의 미트리다테스 6세 흉상

'선량한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는 과도한 로마의 영향력에 맞서 그리스와 이란 문화를 극찬하며 반로마 정책을 채택했다. 로마는 최근 아나톨리아에 소아시아 속주를 만들었고, 또한 라오디케의 섭정 통치 기간 폰투스의 프리기아 지역 지배권을 폐지시키기도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안티파테르 왕에게서 소아르메니아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음, 기원전 115년 – 기원전 106년) 상속과 콜키스 왕국 정복으로 확장을 시작하였다. 케르소네소스의 도시들은 북쪽의 스키타이인들에 대항해 그의 도움을 간청하였다. 미트리다테스는 디오판투스 장군이 지휘하는 6,000명의 병력을 보내주었다. 크림반도 북쪽에 여러 전투를 거친 끝에 그는 케르소네소스 지역 전역을 손에 넣었다. 미트리다테스는 또한 흑해 서부 해안가 도시들과의 무역도 발전시켰다.[59]

그 시기 로마는 유구르타 전쟁과 킴브리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미트리다테스와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둘은 파플라고니아를 침공하여 그들끼리 분할하였다. 로마의 대사가 폰토스 왕국에 보내졌지만, 어떠한 일도 이루지 못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아버지가 과거에 차지했었던 갈라티아의 일부도 점령했고 그의 자매 라오디케가 왕비로 있던 카파도키아 왕국에 개입했다. 기원전 116년 카파도키아의 왕 아리아라테스 6세가 미트리다테스의 지령으로 카파도키아의 귀족 고르디우스에게 살해당했고, 라오디케가 기원전 102년까지 아리아라테스의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맡았다.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3세가 라오디케와 결혼하고부터, 그는 군대를 보내며 카파도키아에 개입하였고; 미트리다테스는 신속하게 침입하여 카파도키아의 왕위에 그의 조카 카파도키아의 아리아라테스 7세를 앉혔다. 둘 사이에 곧 전쟁이 발생하여, 미트리다테스는 대규모의 폰토스 군대를 이끌고 침입했으나, 아리아라테스 7세는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인 기원전 101년에 살해당했다. 그 후 미트리다테스는 섭정으로서 고르디우스를 둔체 그의 아들을 카파도키아의 아리아라테스 9세로 세웠다. 기원전 97년 카파도키아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미트리다테스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다. 그뒤에 미트리다테스와 니코메데스 3세는 로마에 대사를 보냈다. 로마 공화정 의회는 미트리다테스가 카파도키아에서, 니코메데스가 파플로고니아에서 포기하도록 명하였다. 미트리다테스는 이 명령을 따랐고, 로마인들은 카파도키아에 아리오바르자네스를 세웠다. 기원전 91/90년 로마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바쁜 시기에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새로운 동맹이자 사위인 대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를 하로금 카파도키아를 침입하도록 했고, 아리오바르자네스는 로마로 달아났다. 미트리다테스는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4세를 폐위시키고,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를 왕위에 앉혔다.[60]

====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

기원전 90년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휘하의 로마 군대가 소아시아에 도착하자 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는 철수했다. 카파도키아와 비티니아는 각 군주에게 반환되었지만, 로마 원로원에게 뇌물을 바친 탓에 로마에 막대한 부채를 지게 되었고, 니코메데스 4세는 결국 아킬리우스의 설득으로 부채를 갚기 위해 폰토스를 공격하게 되었다. 그는 아마스트리스까지 약탈했으며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미트리다테스는 다시 한 번 카파도키아를 침공했고, 로마는 전쟁을 선포했다.[26]

기원전 89년 여름, 미트리다테스는 비티니아를 침공하여 전투에서 니코메데스와 아킬리우스를 격파했다. 그는 신속하게 로마령 아시아로 진격했고 저항은 무너졌다. 기원전 88년까지 그는 새로 창설된 속주의 대부분을 항복시켰다. 그는 많은 도시에서 환영받았는데, 그곳의 주민들은 로마의 세금 징수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는 또한 최소 80,000명의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아시아의 만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소아시아의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기꺼이 이 명령을 수행했는데, 이는 그들이 더 이상 로마와 동맹을 맺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장했다. 기원전 88년 가을, 미트리다테스는 또한 로도스를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27]

아테네에서는 로마 반대 세력이 이 소식을 듣고 용기를 얻어 곧 미트리다테스와 동맹을 맺었다. 폰토스-아테네 해군 연합군은 기원전 88년에 델로스를 점령했고, 이 도시를 아테네에 양도했다. 스파르타, 아카이아 동맹, 테스피아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보이오티아 동맹을 포함하여 많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이제 미트리다테스에 합류했다. 마침내 기원전 8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이탈리아에서 다섯 군단을 이끌고 출병했다. 그는 신속하게 항복한 보이오티아를 거쳐 아테네와 피레우스 (더 이상 긴 성벽으로 연결되지 않은 아테네 항구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아테네는 기원전 86년 3월에 함락되었고, 도시는 약탈당했다. 격렬한 저항 끝에 피레우스에 있던 폰토스 장군 아르켈라우스는 배를 타고 떠났고, 술라는 항구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한편,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아들 아르카티아스를 트라키아를 통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보냈다.[28]

|thumb|200px|right|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술라는 이제 북쪽으로 향하여 그의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비옥한 보이오티아 평원을 찾았다.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술라는 아르켈라우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지만, 아르켈라우스는 퇴각하여 폰토스 함대를 이끌고 계속해서 그리스를 약탈했다. 아르켈라우스는 재편성하여 기원전 85년 오르코메누스 전투에서 두 번째 공격을 가했지만 다시 패배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러한 손실과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불안, 그리고 비티니아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던 로마 군대의 존재로 인해 미트리다테스는 평화 협정을 수락해야 했다. 미트리다테스와 술라는 기원전 85년 다르다누스에서 만났다. 술라는 미트리다테스에게 로마령 아시아를 넘겨주고 비티니아와 카파도키아를 이전의 왕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그는 또한 2,000 탈렌트를 지불하고 배를 제공해야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나머지 영토를 유지하고 로마의 동맹이 될 수 있었다.[29]

==== 제2차,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

술라와의 강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83년부터 82년까지 미트리다테스 6세는 술라가 아시아 속주 관리를 위해 파견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와 싸워 그를 격파했다.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양측 모두 영토를 얻지 못한 채 끝났다. 로마는 리키아와 팜필리아 해안 지역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고, 피시디아리카오니아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다. 기원전 74년 집정관 루쿨루스가 킬리키아를 점령하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두 전선에서 로마 사령관과 맞서게 되었다. 킬리키아 해적들은 완전히 격퇴되지 않았고,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는 또한 스페인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정부와 동맹을 맺었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단검으로 무장한 로마 군단병의 형태로 병력을 재편성했다.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기원전 75년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고 그의 왕국을 로마에 넘겨주면서 발발했다. 기원전 74년 로마는 소아시아에서 군대를 동원했는데, 아마도 미트리다테스 6세의 움직임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이 문제에 대한 자료는 명확하지 않다. 기원전 73년 미트리다테스 6세는 비티니아를 침공했고, 그의 함대는 칼케돈 해상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키지쿠스를 포위했다. 루쿨루스는 프리기아에서 5개 군단을 이끌고 진군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가 폰토스로 후퇴하도록 강요했다.[30] 기원전 72년 루쿨루스는 갈라티아를 통해 폰토스를 침공했고, 할리스 강을 따라 북쪽 해안으로 진군하여 아미소스를 포위했는데, 이 도시는 기원전 70년까지 저항했다. 기원전 71년 그는 이리스 강과 리쿠스 강 계곡을 지나 카베이라에 기지를 세웠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카파도키아 남부로 가는 로마군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 기병대를 보냈지만, 그들은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결전을 피하고 싶어했던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제 소 아르메니아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동맹국 티그라네스 대왕의 지원을 기대했다. 약해진 기병대 때문에 후퇴는 전면적인 궤주로 변했고, 폰토스 군의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아들이자 크림 보스포루스 왕국의 통치자인 마카레스는 로마와의 동맹을 모색하게 되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아르메니아로 도망쳤다.[31]

기원전 69년 여름, 루쿨루스는 아르메니아 영토를 침공하여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카파도키아를 거쳐 소페네로 진군했다. 그의 목표는 티그라네스의 제국의 새로운 수도인 티그라노케르타였다. 티그라네스는 병력을 모으기 위해 후퇴했다. 루쿨루스는 도시를 포위했고, 티그라네스는 대규모 중무장 기병대인 카타프락토이를 포함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는데, 그들의 수는 루쿨루스 군대를 훨씬 능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쿨루스는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아르메니아 말들을 향해 돌격했고,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티그라네스는 북쪽으로 도망쳤고 루쿨루스는 그의 새로운 수도를 파괴하고 소페네에 독립을 부여하고 시리아를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13세 아시아티쿠스에게 반환함으로써 남부의 그의 영토를 해체했다. 기원전 68년 루쿨루스는 북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그 나라를 황폐화시키고 니시비스를 점령했지만, 티그라네스는 전투를 피했다. 한편, 미트리다테스 6세는 폰토스를 침공했고, 기원전 67년 젤라 근처에서 대규모 로마군을 격파했다. 이제 지친 병사들과 불만을 품은 병사들을 지휘하게 된 루쿨루스는 폰토스로 철수했고, 그 다음 갈라티아로 철수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신선한 군단을 이끌고 온 두 명의 새로운 집정관, 마르키우스 렉스와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로 교체되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제 폰토스를 되찾았고 티그라네스는 카파도키아를 침공했다.[32]

동지중해에서 해적 활동이 증가함에 따라 원로원은 기원전 67년 폼페이우스에게 지중해 전역에서 광범위한 총독임페리움을 부여했다. 폼페이우스는 해적을 제거했고, 기원전 66년 폰토스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소아시아에서 지휘를 맡았다.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의 군대를 포함하여 약 45,000명의 군단병으로 군대를 조직했고, 파르티아 제국과 동맹을 맺었는데, 그들은 동쪽에서 티그라네스를 공격하고 묶어두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소 아르메니아의 다스테이라 고지대에 약 30,000명의 병력과 2,000~3,000명의 기병으로 군대를 집결시켰다. 폼페이우스는 6주 동안 토목 공사로 그를 포위하기 위해 싸웠지만, 미트리다테스 6세는 결국 북쪽으로 후퇴했다. 폼페이우스는 그를 추격하여 밤에 그의 군대를 기습했고, 폰토스 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전투 후 폼페이우스는 니코폴리스라는 도시를 세웠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기원전 65년에 콜키스로 도망쳤고, 나중에는 크림반도의 그의 아들 마카레스에게로 도망쳤다. 폼페이우스는 이제 동쪽으로 향해 아르메니아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티그라네스는 그에게 항복하여 그의 왕관을 그의 발 앞에 놓았다. 폼페이우스는 티그라네스의 제국 대부분을 동쪽에서 가져갔지만, 그가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남도록 허락했다. 한편, 미트리다테스 6세는 크림반도를 방어하기 위해 조직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파르나케스가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자살하거나 암살당해야 했다.[33]

=== 로마의 속주와 위성국 ===

폰토스 왕국의 서부 지역 대부분과 시노페를 포함한 해안가의 그리스 도시들은 로마의 비티니아 폰투스 속주로서 직접 통치에 놓였다.[69] 내륙과 동부 해안가는 독립적인 위성국에 남았다. 보스포루스 왕국 역시도 로마의 동맹이자 친구인 파르나케스 2세 하에서 독립을 유지했다. 콜키스도 위성국으로 편입되었다.[69] 파르나케스 2세는 이후 폰토스 지역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내전을 벌이는 동안 그는 소아시아를 침입하여 (기원전 48년), 콜키스, 소아시아, 폰토스, 카파도키아를 차지하고 니코폴리스에서 로마군을 격퇴시켰다.[69] 카이사르는 신속하게 대응하여 그의 유명한 구절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말한 젤라에서 그를 패배시켰다.[69][34] 폰토스의 왕들은 서기 62년 네로 황제에 의해 폰투스 왕위에서 물러난 폰토스의 폴레몬 2세까지 폰토스, 콜키스, 킬리키아를 다스렸다.[34]

서기 60년 경 로마의 폰토스 위성국.


아나톨리아 기원전 1세기 초, 폰토스가 로마의 속국일 때

3. 1. 키우스의 미트리다테스 왕조

미트리다테스 1세는 기원전 302년 안티고노스 1세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자 데메트리오스 1세의 도움을 받아 6명의 기수를 데리고 동쪽으로 탈출했다.[52][17] 그는 처음에는 파플라고니아의 키미아타로, 이후에는 카파도키아아마시아로 이동하여 기원전 302년부터 266년까지 그곳을 다스렸다.[52][17] 그는 셀레우코스 1세와 대립했으며, 기원전 281년 또는 280년에 카파도키아 북부와 파플라고니아 동부의 왕(바실레우스)임을 선포하고 서쪽으로 상그리스우스 강까지 영토를 확장했다.[52][17] 그의 아들 아리오바르자네스는 기원전 279년에 흑해의 주요 항구인 아마스트리스를 점령하여 폰토스 왕국의 세력을 확장했다.[53][18] 미트리다테스 1세는 갈라티아인과 동맹을 맺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군대를 격파했다.[53][18]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제1차 시리아 전쟁을 통해 소아시아에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으며, 헤라클레이아 폰티케와 동맹을 맺어 미트리다테스 1세와 대립 관계에 있었다.[53][18]

폰토스 왕국은 본래 카파도키아 (캇파투카, Katpatuka) 페르시아 샤트라프의 일부였다. 폰토스 왕국을 건국한 페르시아계 가문은 기원전 4세기에 미시아 지역의 그리스 도시 키우스를 다스렸으며, 이 가문 최초로 알려진 인물은 키우스의 미트리다테스였다.

3. 2. 폰토스 왕국의 발전과 헬레니즘화

아리오바르자네스의 짧은 통치 기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가 사망한 후 아들인 미트리다테스 2세 (기원전 250년 — 기원전189년)가 왕위를 이었으나 갈라티아인들에게 공격받았다.[54][19] 미트리다테스 2세는 당시 갈라티아인들과 전쟁 중이던 헤라클레이아 폰티케의 도움을 받았으며,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에 대항하던 안티오고스 히에락스를 지원하기도 했다.[54] 미트리다테스 2세는 기원전 220년에 시노페를 공격했으나 점령에는 실패했고, 셀레우코스 2세의 자매와 혼인하여 폰토스 왕국과 셀레우코스 제국 간의 유대 관계를 강화했다.[54][19] 미트리다테스 2세 사후, 그의 아들 미트리다테스 3세의 집권 시기 (기원전 220년 – 기원전 198/88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54][19]

파르나케스 1세 (기원전 189년 – 기원전 159년)는 흑해 연안의 그리스 도시들을 정복하며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55][20] 그는 기원전 188년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에 대항하는 비티니아의 프루시아스 1세의 전쟁에 동참하였으나,[55] 기원전 183년에 강화 조약을 맺었다.[55][20] 파르나케스 1세는 기원전 182년에 시노페를 점령하고, 코티오라, 파르나시아, 동쪽의 트라페주스 등의 해안 도시들을 차지하여 아나톨리아 북부 해안가 대부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55][20] 그는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와 카파도키아의 아리아라테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기원전 179년에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갈라티아파플라고니아, 티움 도시 등 정복한 지역들을 포기해야만 했다.[55][20] 그러나 시노페는 계속 유지했다.[55][20] 파르나케스 1세는 북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케르소네소스의 도시들과 불가리아 해안가에 있는 오데수스 같은 다른 흑해 도시들과 동맹을 맺었다.[55][20]

파르나케스 1세의 형제 미트리다테스 4세는 친로마 정책을 추구하며, 기원전 155년 비티니아의 프루시아스 2세에 맞선 로마의 동맹 아탈루스 2세 필라델포스에게 도움을 주었다.[56][21] 그의 후임자 미트리다테스 5세 에우에르게테스는 로마의 동맹으로 남아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했고, 에우메네스 3세 (아리스토니쿠스)에 맞서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57][22] 로마는 페르가몬 왕국의 일부를 소아시아 속주로 전환시키는 한편, 미트리다테스 5세에게 프리기아 주요 지역을 수여했다.[57][22] 미트리다테스 5세는 그의 딸 라오디케를 카파도키아의 왕 아리아라테스 6세와 혼인시켰다.[57][22]

미트리다테스 5세는 그리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헬레니즘화를 추진했다.[57] 그는 에게 해 지역의 그리스 용병들을 폭넓게 사용한 최초의 폰토스 왕이었고, 델로스에서 의식을 치렀으며, 그의 왕국에서 발행되는 주화에 아폴론처럼 자신을 새겨넣기도 했다.[57][22] 미트리다테스 5세는 기원전 121/0년 시노페에서 암살당했다.[57][22] 미트리다테스 5세의 두 아들 미트리다테스 6세와 미트리다테스 크레스투스가 아직 어렸기에, 폰토스는 그의 부인 라오디케의 섭정 통치하에 놓였다.[58][23]

3. 3. 미트리다테스 6세와 로마와의 전쟁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미트리다테스 6세의 흉상[59]

'선량한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는 과도한 로마의 영향력에 맞서 그리스와 이란 문화를 극찬하며 반로마 정책을 채택했다. 로마는 최근 아나톨리아에 소아시아 속주를 만들었고, 또한 라오디케의 섭정 통치 기간 폰투스의 프리기아 지역 지배권을 폐지시키기도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안티파테르 왕에게서 소아르메니아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음, 기원전 115년 – 기원전 106년) 상속과 콜키스 왕국 정복으로 확장을 시작하였다. 케르소네소스의 도시들은 북쪽의 스키타이인들에 대항해 그의 도움을 간청하였다. 미트리다테스는 디오판투스 장군이 지휘하는 6,000명의 병력을 보내주었다. 크림반도 북쪽에 여러 전투를 거친 끝에 그는 케르소네소스 지역 전역을 손에 넣었다. 미트리다테스는 또한 흑해 서부 해안가 도시들과의 무역도 발전시켰다.[59]

그 시기 로마는 유구르타 전쟁과 킴브리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미트리다테스와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둘은 파플라고니아를 침공하여 그들끼리 분할하였다. 로마의 대사가 폰토스 왕국에 보내졌지만, 어떠한 일도 이루지 못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아버지가 과거에 차지했었던 갈라티아의 일부도 점령했고 그의 자매 라오디케가 왕비로 있던 카파도키아 왕국에 개입했다. 기원전 116년 카파도키아의 왕 아리아라테스 6세가 미트리다테스의 지령으로 카파도키아의 귀족 고르디우스에게 살해당했고, 라오디케가 기원전 102년까지 아리아라테스의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맡았다.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3세가 라오디케와 결혼하고부터, 그는 군대를 보내며 카파도키아에 개입하였고; 미트리다테스는 신속하게 침입하여 카파도키아의 왕위에 그의 조카 카파도키아의 아리아라테스 7세를 앉혔다. 둘 사이에 곧 전쟁이 발생하여, 미트리다테스는 대규모의 폰토스 군대를 이끌고 침입했으나, 아리아라테스 7세는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인 기원전 101년에 살해당했다. 그 후 미트리다테스는 섭정으로서 고르디우스를 둔체 그의 아들을 카파도키아의 아리아라테스 9세로 세웠다. 기원전 97년 카파도키아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미트리다테스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다. 그뒤에 미트리다테스와 니코메데스 3세는 로마에 대사를 보냈다. 로마 공화정 의회는 미트리다테스가 카파도키아에서, 니코메데스가 파플로고니아에서 포기하도록 명하였다. 미트리다테스는 이 명령을 따랐고, 로마인들은 카파도키아에 아리오바르자네스를 세웠다. 기원전 91/90년 로마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바쁜 시기에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새로운 동맹이자 사위인 대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를 하로금 카파도키아를 침입하도록 했고, 아리오바르자네스는 로마로 달아났다. 미트리다테스는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4세를 폐위시키고,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를 왕위에 앉혔다.[60]

|thumb|right|루브르 박물관의 미트리다테스 6세 흉상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 '선한 아버지'는 그리스와 이란 문화를 옹호하며 끊임없이 확장되는 로마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결연한 반 로마 정책을 따랐다. 로마는 최근 아나톨리아에 소아시아 속주를 설치했고, 라오디케 여왕 통치 기간 동안 폰토스에서 프리지아 마조르 지역을 철회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안티파테르 왕(정확한 날짜는 미상, 기원전 115-106년경)으로부터 소 아르메니아를 상속받고 콜키스 왕국을 정복함으로써 확장을 시작했다. 콜키스는 흑해 무역의 중요한 지역으로, 금, 밀랍, 삼, 꿀이 풍부했다. 이제 타우릭 헤르소네소스의 도시들은 북쪽의 스키타이에 대항하기 위해 그의 지원을 요청했다. 미트리다테스는 디오판토스 장군 휘하에 6,000명의 병력을 보냈다. 크림 반도의 북부에서 여러 차례의 원정을 거친 후, 그는 헤르소네소스 전역을 지배했다. 미트리다테스는 또한 흑해 서부 해안의 도시들과 무역 관계를 발전시켰다.[24]

당시 로마는 유구르타 전쟁과 킴브리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미트리다테스와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는 파플라고니아를 침략하여 그 지역을 분할했다. 로마의 사절단이 파견되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미트리다테스는 또한 아버지의 왕국이었던 갈라티아의 일부를 점령했고, 누이 라오디케가 여왕이었던 카파도키아에 개입했다. 기원전 116년, 카파도키아의 왕 아리아라테스 6세는 미트리다테스의 사주를 받은 카파도키아 귀족 고르디우스에 의해 살해되었고, 라오디케는 기원전 102년까지 아리아라테스의 아들들을 대신해 섭정으로 통치했다.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3세가 라오디케와 결혼한 후, 그는 군대를 보내 그 지역에 개입하려 했고, 미트리다테스는 신속하게 침략하여 조카 카파도키아의 아리아라테스 7세를 카파도키아의 왕위에 앉혔다. 곧 두 사람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미트리다테스는 대규모 폰토스 군대를 이끌고 침략했지만, 아리아라테스 7세는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기원전 101년에 살해되었다. 미트리다테스는 이후 여덟 살 된 아들 카파도키아의 아리아라테스 9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고르디우스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97년 카파도키아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미트리다테스는 즉시 진압했다. 그 후, 미트리다테스와 니코메데스 3세는 모두 로마에 사절단을 보냈다. 로마 원로원은 미트리다테스가 카파도키아에서, 니코메데스는 파플라고니아에서 철수하라고 포고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이에 따랐고, 로마는 아리오바르자네스를 카파도키아에 임명했다. 기원전 91/90년, 로마가 이탈리아에서 사회 전쟁으로 바쁜 틈을 타, 미트리다테스는 새로운 동맹이자 사위인 아르메니아의 왕 티그라네스 대왕에게 카파도키아를 침략하도록 부추겼고, 티그라네스는 실제로 그렇게 했으며, 아리오바르자네스는 로마로 도망갔다. 미트리다테스는 이후 비티니아에서 니코메데스 4세를 폐위시키고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를 왕위에 앉혔다.[25]

##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기원전 90년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휘하의 로마 군대가 소아시아에 도착하자 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는 철수했다. 카파도키아비티니아는 각 군주에게 반환되었지만, 로마 원로원에게 뇌물을 바친 탓에 로마에 막대한 부채를 지게 되었고, 니코메데스 4세는 결국 아킬리우스의 설득으로 부채를 갚기 위해 폰토스를 공격하게 되었다. 그는 아마스트리스까지 약탈했으며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미트리다테스는 다시 한 번 카파도키아를 침공했고, 로마는 전쟁을 선포했다.[26]

기원전 89년 여름, 미트리다테스는 비티니아를 침공하여 전투에서 니코메데스와 아킬리우스를 격파했다. 그는 신속하게 로마령 소아시아로 진격했고 저항은 무너졌다. 기원전 88년까지 그는 새로 창설된 속주의 대부분을 항복시켰다. 그는 많은 도시에서 환영받았는데, 그곳의 주민들은 로마의 세금 징수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는 또한 최소 80,000명의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아시아의 만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소아시아의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기꺼이 이 명령을 수행했는데, 이는 그들이 더 이상 로마와 동맹을 맺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장했다. 기원전 88년 가을, 미트리다테스는 또한 로도스를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27]

아테네에서는 로마 반대 세력이 이 소식을 듣고 용기를 얻어 곧 미트리다테스와 동맹을 맺었다. 폰토스-아테네 해군 연합군은 기원전 88년에 델로스를 점령했고, 이 도시를 아테네에 양도했다. 스파르타, 아카이아 동맹, 테스피아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보이오티아 동맹을 포함하여 많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이제 미트리다테스에 합류했다. 마침내 기원전 8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이탈리아에서 다섯 군단을 이끌고 출병했다. 그는 신속하게 항복한 보이오티아를 거쳐 아테네와 피레우스 (더 이상 긴 성벽으로 연결되지 않은 아테네 항구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아테네는 기원전 86년 3월에 함락되었고, 도시는 약탈당했다. 격렬한 저항 끝에 피레우스에 있던 폰토스 장군 아르켈라우스는 배를 타고 떠났고, 술라는 항구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한편,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아들 아르카티아스를 트라키아를 통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보냈다.[28]

|thumb|200px|right|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술라는 이제 북쪽으로 향하여 그의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비옥한 보이오티아 평원을 찾았다.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술라는 아르켈라우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지만, 아르켈라우스는 퇴각하여 폰토스 함대를 이끌고 계속해서 그리스를 약탈했다. 아르켈라우스는 재편성하여 기원전 85년 오르코메누스 전투에서 두 번째 공격을 가했지만 다시 패배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러한 손실과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불안, 그리고 비티니아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던 로마 군대의 존재로 인해 미트리다테스는 평화 협정을 수락해야 했다. 미트리다테스와 술라는 기원전 85년 다르다누스에서 만났다. 술라는 미트리다테스에게 로마령 소아시아를 넘겨주고 비티니아카파도키아를 이전의 왕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그는 또한 2,000 탈렌트를 지불하고 배를 제공해야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나머지 영토를 유지하고 로마의 동맹이 될 수 있었다.[29]

## 제2차,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술라와의 강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83년부터 82년까지 미트리다테스 6세는 술라가 소아시아 속주 관리를 위해 파견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와 싸워 그를 격파했다.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양측 모두 영토를 얻지 못한 채 끝났다. 로마는 리키아와 팜필리아 해안 지역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고, 피시디아리카오니아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다. 기원전 74년 집정관 루쿨루스가 킬리키아를 점령하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두 전선에서 로마 사령관과 맞서게 되었다. 킬리키아 해적들은 완전히 격퇴되지 않았고,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는 또한 스페인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정부와 동맹을 맺었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단검으로 무장한 로마 군단병의 형태로 병력을 재편성했다.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기원전 75년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고 그의 왕국을 로마에 넘겨주면서 발발했다. 기원전 74년 로마는 소아시아에서 군대를 동원했는데, 아마도 미트리다테스 6세의 움직임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이 문제에 대한 자료는 명확하지 않다. 기원전 73년 미트리다테스 6세는 비티니아를 침공했고, 그의 함대는 칼케돈 해상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키지쿠스를 포위했다. 루쿨루스는 프리기아에서 5개 군단을 이끌고 진군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가 폰토스로 후퇴하도록 강요했다.[30] 기원전 72년 루쿨루스는 갈라티아를 통해 폰토스를 침공했고, 할리스 강을 따라 북쪽 해안으로 진군하여 아미소스를 포위했는데, 이 도시는 기원전 70년까지 저항했다. 기원전 71년 그는 이리스 강과 리쿠스 강 계곡을 지나 카베이라에 기지를 세웠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카파도키아 남부로 가는 로마군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 기병대를 보냈지만, 그들은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결전을 피하고 싶어했던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제 소 아르메니아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동맹국 티그라네스 대왕의 지원을 기대했다. 약해진 기병대 때문에 후퇴는 전면적인 궤주로 변했고, 폰토스 군의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아들이자 크림 보스포루스 왕국의 통치자인 마카레스는 로마와의 동맹을 모색하게 되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아르메니아로 도망쳤다.[31]

기원전 69년 여름, 루쿨루스는 아르메니아 영토를 침공하여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카파도키아를 거쳐 소페네로 진군했다. 그의 목표는 티그라네스의 제국의 새로운 수도인 티그라노케르타였다. 티그라네스는 병력을 모으기 위해 후퇴했다. 루쿨루스는 도시를 포위했고, 티그라네스는 대규모 중무장 기병대인 카타프락토이를 포함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는데, 그들의 수는 루쿨루스 군대를 훨씬 능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쿨루스는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아르메니아 말들을 향해 돌격했고,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티그라네스는 북쪽으로 도망쳤고 루쿨루스는 그의 새로운 수도를 파괴하고 소페네에 독립을 부여하고 시리아를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13세 아시아티쿠스에게 반환함으로써 남부의 그의 영토를 해체했다. 기원전 68년 루쿨루스는 북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그 나라를 황폐화시키고 니시비스를 점령했지만, 티그라네스는 전투를 피했다. 한편, 미트리다테스 6세는 폰토스를 침공했고, 기원전 67년 젤라 근처에서 대규모 로마군을 격파했다. 이제 지친 병사들과 불만을 품은 병사들을 지휘하게 된 루쿨루스는 폰토스로 철수했고, 그 다음 갈라티아로 철수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신선한 군단을 이끌고 온 두 명의 새로운 집정관, 마르키우스 렉스와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로 교체되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제 폰토스를 되찾았고 티그라네스는 카파도키아를 침공했다.[32]

동지중해에서 해적 활동이 증가함에 따라 원로원은 기원전 67년 폼페이우스에게 지중해 전역에서 광범위한 총독임페리움을 부여했다. 폼페이우스는 해적을 제거했고, 기원전 66년 폰토스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소아시아에서 지휘를 맡았다.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의 군대를 포함하여 약 45,000명의 군단병으로 군대를 조직했고, 파르티아 제국과 동맹을 맺었는데, 그들은 동쪽에서 티그라네스를 공격하고 묶어두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소 아르메니아의 다스테이라 고지대에 약 30,000명의 병력과 2,000~3,000명의 기병으로 군대를 집결시켰다. 폼페이우스는 6주 동안 토목 공사로 그를 포위하기 위해 싸웠지만, 미트리다테스 6세는 결국 북쪽으로 후퇴했다. 폼페이우스는 그를 추격하여 밤에 그의 군대를 기습했고, 폰토스 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전투 후 폼페이우스는 니코폴리스라는 도시를 세웠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기원전 65년에 콜키스로 도망쳤고, 나중에는 크림반도의 그의 아들 마카레스에게로 도망쳤다. 폼페이우스는 이제 동쪽으로 향해 아르메니아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티그라네스는 그에게 항복하여 그의 왕관을 그의 발 앞에 놓았다. 폼페이우스는 티그라네스의 제국 대부분을 동쪽에서 가져갔지만, 그가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남도록 허락했다. 한편, 미트리다테스 6세는 크림반도를 방어하기 위해 조직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파르나케스가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자살하거나 암살당해야 했다.[33]

3. 3. 1.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기원전 90년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휘하의 로마 군대가 소아시아에 도착하자 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는 철수했다. 카파도키아와 비티니아는 각 군주에게 반환되었지만, 로마 원로원에게 뇌물을 바친 탓에 로마에 막대한 부채를 지게 되었고, 니코메데스 4세는 결국 아킬리우스의 설득으로 부채를 갚기 위해 폰토스를 공격하게 되었다. 그는 아마스트리스까지 약탈했으며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미트리다테스는 다시 한 번 카파도키아를 침공했고, 로마는 전쟁을 선포했다.[26]

기원전 89년 여름, 미트리다테스는 비티니아를 침공하여 전투에서 니코메데스와 아킬리우스를 격파했다. 그는 신속하게 로마령 아시아로 진격했고 저항은 무너졌다. 기원전 88년까지 그는 새로 창설된 속주의 대부분을 항복시켰다. 그는 많은 도시에서 환영받았는데, 그곳의 주민들은 로마의 세금 징수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는 또한 최소 80,000명의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아시아의 만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소아시아의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기꺼이 이 명령을 수행했는데, 이는 그들이 더 이상 로마와 동맹을 맺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장했다. 기원전 88년 가을, 미트리다테스는 또한 로도스를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27]

아테네에서는 로마 반대 세력이 이 소식을 듣고 용기를 얻어 곧 미트리다테스와 동맹을 맺었다. 폰토스-아테네 해군 연합군은 기원전 88년에 델로스를 점령했고, 이 도시를 아테네에 양도했다. 스파르타, 아카이아 동맹, 테스피아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보이오티아 동맹을 포함하여 많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이제 미트리다테스에 합류했다. 마침내 기원전 8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이탈리아에서 다섯 군단을 이끌고 출병했다. 그는 신속하게 항복한 보이오티아를 거쳐 아테네와 피레우스 (더 이상 긴 성벽으로 연결되지 않은 아테네 항구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아테네는 기원전 86년 3월에 함락되었고, 도시는 약탈당했다. 격렬한 저항 끝에 피레우스에 있던 폰토스 장군 아르켈라우스는 배를 타고 떠났고, 술라는 항구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한편,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아들 아르카티아스를 트라키아를 통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보냈다.[28]

|thumb|200px|right|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술라는 이제 북쪽으로 향하여 그의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비옥한 보이오티아 평원을 찾았다.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술라는 아르켈라우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지만, 아르켈라우스는 퇴각하여 폰토스 함대를 이끌고 계속해서 그리스를 약탈했다. 아르켈라우스는 재편성하여 기원전 85년 오르코메누스 전투에서 두 번째 공격을 가했지만 다시 패배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러한 손실과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불안, 그리고 비티니아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던 로마 군대의 존재로 인해 미트리다테스는 평화 협정을 수락해야 했다. 미트리다테스와 술라는 기원전 85년 다르다누스에서 만났다. 술라는 미트리다테스에게 로마령 아시아를 넘겨주고 비티니아와 카파도키아를 이전의 왕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그는 또한 2,000 탈렌트를 지불하고 배를 제공해야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나머지 영토를 유지하고 로마의 동맹이 될 수 있었다.[29]

3. 3. 2. 제2차,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술라와의 강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83년부터 82년까지 미트리다테스 6세는 술라가 아시아 속주 관리를 위해 파견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와 싸워 그를 격파했다.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양측 모두 영토를 얻지 못한 채 끝났다. 로마는 리키아와 팜필리아 해안 지역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고, 피시디아리카오니아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다. 기원전 74년 집정관 루쿨루스가 킬리키아를 점령하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두 전선에서 로마 사령관과 맞서게 되었다. 킬리키아 해적들은 완전히 격퇴되지 않았고,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는 또한 스페인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정부와 동맹을 맺었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단검으로 무장한 로마 군단병의 형태로 병력을 재편성했다.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기원전 75년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고 그의 왕국을 로마에 넘겨주면서 발발했다. 기원전 74년 로마는 소아시아에서 군대를 동원했는데, 아마도 미트리다테스 6세의 움직임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이 문제에 대한 자료는 명확하지 않다. 기원전 73년 미트리다테스 6세는 비티니아를 침공했고, 그의 함대는 칼케돈 해상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키지쿠스를 포위했다. 루쿨루스는 프리기아에서 5개 군단을 이끌고 진군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가 폰토스로 후퇴하도록 강요했다.[30] 기원전 72년 루쿨루스는 갈라티아를 통해 폰토스를 침공했고, 할리스 강을 따라 북쪽 해안으로 진군하여 아미소스를 포위했는데, 이 도시는 기원전 70년까지 저항했다. 기원전 71년 그는 이리스 강과 리쿠스 강 계곡을 지나 카베이라에 기지를 세웠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카파도키아 남부로 가는 로마군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 기병대를 보냈지만, 그들은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결전을 피하고 싶어했던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제 소 아르메니아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동맹국 티그라네스 대왕의 지원을 기대했다. 약해진 기병대 때문에 후퇴는 전면적인 궤주로 변했고, 폰토스 군의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아들이자 크림 보스포루스 왕국의 통치자인 마카레스는 로마와의 동맹을 모색하게 되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아르메니아로 도망쳤다.[31]

기원전 69년 여름, 루쿨루스는 아르메니아 영토를 침공하여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카파도키아를 거쳐 소페네로 진군했다. 그의 목표는 티그라네스의 제국의 새로운 수도인 티그라노케르타였다. 티그라네스는 병력을 모으기 위해 후퇴했다. 루쿨루스는 도시를 포위했고, 티그라네스는 대규모 중무장 기병대인 카타프락토이를 포함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는데, 그들의 수는 루쿨루스 군대를 훨씬 능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쿨루스는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아르메니아 말들을 향해 돌격했고,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티그라네스는 북쪽으로 도망쳤고 루쿨루스는 그의 새로운 수도를 파괴하고 소페네에 독립을 부여하고 시리아를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13세 아시아티쿠스에게 반환함으로써 남부의 그의 영토를 해체했다. 기원전 68년 루쿨루스는 북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그 나라를 황폐화시키고 니시비스를 점령했지만, 티그라네스는 전투를 피했다. 한편, 미트리다테스 6세는 폰토스를 침공했고, 기원전 67년 젤라 근처에서 대규모 로마군을 격파했다. 이제 지친 병사들과 불만을 품은 병사들을 지휘하게 된 루쿨루스는 폰토스로 철수했고, 그 다음 갈라티아로 철수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신선한 군단을 이끌고 온 두 명의 새로운 집정관, 마르키우스 렉스와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로 교체되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제 폰토스를 되찾았고 티그라네스는 카파도키아를 침공했다.[32]

동지중해에서 해적 활동이 증가함에 따라 원로원은 기원전 67년 폼페이우스에게 지중해 전역에서 광범위한 총독임페리움을 부여했다. 폼페이우스는 해적을 제거했고, 기원전 66년 폰토스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소아시아에서 지휘를 맡았다.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의 군대를 포함하여 약 45,000명의 군단병으로 군대를 조직했고, 파르티아 제국과 동맹을 맺었는데, 그들은 동쪽에서 티그라네스를 공격하고 묶어두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소 아르메니아의 다스테이라 고지대에 약 30,000명의 병력과 2,000~3,000명의 기병으로 군대를 집결시켰다. 폼페이우스는 6주 동안 토목 공사로 그를 포위하기 위해 싸웠지만, 미트리다테스 6세는 결국 북쪽으로 후퇴했다. 폼페이우스는 그를 추격하여 밤에 그의 군대를 기습했고, 폰토스 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전투 후 폼페이우스는 니코폴리스라는 도시를 세웠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기원전 65년에 콜키스로 도망쳤고, 나중에는 크림반도의 그의 아들 마카레스에게로 도망쳤다. 폼페이우스는 이제 동쪽으로 향해 아르메니아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티그라네스는 그에게 항복하여 그의 왕관을 그의 발 앞에 놓았다. 폼페이우스는 티그라네스의 제국 대부분을 동쪽에서 가져갔지만, 그가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남도록 허락했다. 한편, 미트리다테스 6세는 크림반도를 방어하기 위해 조직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파르나케스가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자살하거나 암살당해야 했다.[33]

3. 4. 로마의 속주와 위성국

폰토스 왕국의 서부 지역 대부분과 시노페를 포함한 해안가의 그리스 도시들은 로마의 비티니아 폰투스 속주로서 직접 통치에 놓였다.[69] 내륙과 동부 해안가는 독립적인 위성국에 남았다. 보스포루스 왕국 역시도 로마의 동맹이자 친구인 파르나케스 2세 하에서 독립을 유지했다. 콜키스도 위성국으로 편입되었다.[69] 파르나케스 2세는 이후 폰토스 지역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내전을 벌이는 동안 그는 소아시아를 침입하여 (기원전 48년), 콜키스, 소아시아, 폰토스, 카파도키아를 차지하고 니코폴리스에서 로마군을 격퇴시켰다.[69] 카이사르는 신속하게 대응하여 그의 유명한 구절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말한 젤라에서 그를 패배시켰다.[69][34] 폰토스의 왕들은 서기 62년 네로 황제에 의해 폰투스 왕위에서 물러난 폰토스의 폴레몬 2세까지 폰토스, 콜키스, 킬리키아를 다스렸다.[34]

4. 폰토스 왕국의 군사

폰토스 왕국의 군대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왕국 전역에서 병사를 모집했다. 정규군에는 아르메니아인, 바스타르나에, 비티니아인, 카파도키아인, 갈라티아인, 헤니오키, 야지게스, 코랄로이, 백시리아인, 프리기아인, 사르마티아인, 스키타이인, 타우리, 트라키아인 뿐만 아니라 흑해 주변의 다른 지역 출신의 병사들도 포함되었다. 군 복무를 한 그리스인들은 정규군에 속하지 않고, 각 도시의 시민으로서 싸웠다.[35]

많은 헬레니즘 군대처럼 폰토스 군대는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채택했다. 예를 들어, 차이에리아 전투에서 술라에 대항하여 ''칼카스피데스''('청동 방패') 군단을 배치했다.[36] 같은 전투에서 15,000명의 팔랑크스 병사들이 해방된 노예들로부터 모집되었다.[37] 폰토스는 카타프락토이를 포함한 다양한 기병 부대를 운용했으며,[38] 일반 기병 외에도 낫 전차를 운용했다.[39]

미트리다테스 6세 치하의 폰토스는 "로마식"으로 무장하고 "로마식 팔랑크스 대형으로 훈련받은" 120,000명의 병력 부대를 운용했다.[40] 이 부대는 로마 군단을 모방했지만, 어느 정도까지 이를 달성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해군은 육군과 유사한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왕국 자체가 주요 선박을 제공했지만, 작은 부분은 그리스 도시들을 대표했다. 선원들은 왕국의 다양한 부족 출신이거나 그리스인이었다.[35]

5. 폰토스 왕국의 문화와 유산

참조

[1] 간행물 PONTUS https://www.iranicao[...] 2004
[2]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Mithridates VI Eupator, King of Pontus
[3] 서적 Children of Achilles: The Greeks in Asia Minor Since the Days of Troy
[4] 서적 Strabo of Amasia: A Greek Man of Letters in Augustan Rome
[5] 웹사이트 Pontus http://www.iranicaon[...] 2004
[6] 논문 The origins of the Pontic house 1998-11
[7] 문서 Geography
[8] 논문 Veni Vidi Vici and Caesar's Triumph 2013-12
[9] 간행물 Blackwell Publishing 2012
[10] 서적 Children of Achilles: The Greeks in Asia Minor Since the Days of Troy
[11]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Mithridates VI Eupator, King of Pontus
[12] 서적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ume IX. The Last Age of the Roman Republic, 146–43 B.C.
[13] 서적 Cambridge Ancient
[14] 서적 The Origins of the Mithraic Mysteries
[15]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Mithridates VI Eupator, King of Pontus
[16] 문서 Cyropaedia
[17] 문서 the Mithridatic wars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Histories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Cambridge Ancient
[24] 문서 Cambridge Ancient
[25] 문서 Cambridge Ancient
[26] 문서
[27] 문서 Cambridge Ancient
[28] 문서 Cambridge Ancient
[29] 문서 Cambridge Ancient
[30] 문서 Cambridge Ancient
[31] 문서 Cambridge Ancient
[32] 문서 Cambridge Ancient
[33] 문서 Cambridge Ancient
[34] 서적 "Who's who in the Greek world"
[35] 웹사이트 Kingdom of Pontus http://www.ehw.gr/l.[...] 2008
[36] 서적 Life of Sulla
[37] 서적 Life of Sulla
[38] 서적 The Cambridge Companion to the Hellenistic World
[39] 서적 Life of Sulla
[40] 서적 Life of Lucullus
[41]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Mithridates VI Eupator, King of Pontus
[42] 서적 Children of Achilles: The Greeks in Asia Minor Since the Days of Troy
[43] 서적 Strabo of Amasia: A Greek Man of Letters in Augustan Rome
[44]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iranicaon[...] 2017-11-20
[45]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Mithridates VI Eupator, King of Pontus
[46] 서적 Children of Achilles: The Greeks in Asia Minor Since the Days of Troy
[47] 서적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ume IX. The Last Age of the Roman Republic, 146–43 B.C.
[48] 서적 Cambridge Ancient
[49] 서적 The Origins of the Mithraic Mysteries
[50]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Mithridates VI Eupator, King of Pontus
[51] 서적 Cyropaedia
[52] 서적 the Mithridatic wars
[53] 서적
[54] 서적
[55] 서적 Histories
[56] 서적
[57] 서적
[58] 서적 Cambridge Ancient
[59] 서적 Cambridge Ancient
[60] 서적 Cambridge Ancient
[61] 서적
[62] 서적 Cambridge Ancient
[63] 서적 Cambridge Ancient
[64] 서적 Cambridge Ancient
[65] 서적 Cambridge Ancient
[66] 서적 Cambridge Ancient
[67] 서적 Cambridge Ancient
[68] 서적 Cambridge Ancient
[69] 서적 Who's who in the Greek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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